‘기원전 1177년 그 이후’ 리뷰: 청동기는 어떻게 철기가 되었나
지중해를 둘러싼 세상의 적응과 변화 – 혹은 쇠퇴와 멸망.
- 2024-04-15 12:15 ET
근동과 에게해, 즉 이집트와 그리스, 페르시아라 부르던 고대 유럽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3000년 경에 시작되어 기원전 1500년대에 정점을 찍고, 기원전 1200~1100년대에 급격히 붕괴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집트 제국은 영구적인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며, 히타이트 제국은 무너졌고, 아시리아와 바빌론도 무사하지 않았다. 미케네, 미노스, 가나안은 아예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리스 본토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고, 문학이라는 건 물론 정치체계에 대한 개념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 헤시오도스가 “철의 시대”라고 명명한, 무지와 전쟁, 빈곤의 시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한 때 역사가들은 기원전 1177년에 발생한 대침공, 이집트인들이 바다민족이라 기록했고, 후대의 그리스인들이 도리아인이라 부른 거대 유민들의 이동에 의해 청동기가 멸망했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한 순간의 대침공은 없었다는 학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민족이 동부 지중해로 건너왔는데, 몇몇은 땅을 가로질러, 몇몇은 평화롭게, 대다수는 가뭄과 기아로 인해 정착지를 옮긴 것이다. 이 몇 세기에 걸친 대 이동 과정에서 스스로를 바다민족이나 그리스인으로 자칭한 민족은 없었다. 이집트의 멸망에서 외부의 침습은 그저 한 가지 이유일 뿐, 남부 국경에서의 외교적 불안정, ‘비이집트인’의 무덤 도굴 사태, 정치인들의 붕당화 같은 일들이 난적해있었다.
에릭 H. 클라인의 2014년 저서 “기원전 1177년: 문명이 무너진 해”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시스템의 실패에 따른 도미노 효과와 기하급수적 스노우볼”로 설명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고전인류학 교수이기도 한 클라인은 복잡성 이론과 시스템 분석을 활용해 청동기-철기 전환기를 분석했다. 지중해 세계를 둘러싼 각 제국의 경제체제는 아주 정교했고, 상호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사건에 대해 불규칙적이면서도 비선형적으로 증폭되는 연쇄 상호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1177년 바다 민족의 이집트 침공은 서기 476년 로마가 당한 게르만 민족 대이동과 비슷하게, 쇠퇴의 증거이자 핵심사건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전환은 그저 ‘흘러가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강력한 청동기 시대의 제국이 무너지고 초기 철기 시대의 도시 국가들이 결속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역사는 연속적이다. 클라인은 올해 새로운 저서 “기원전 1177년 그 이후”에서 “침공”이 아닌 그 이후를 설명했다. 헤시오도스는 이 시기를 두고 “끔찍한 고통의 시대”라고 단언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중에도 분명 악에 섞인 선이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후기 청동기 사회는 다가올 미래에 적응하고 변화하거나, 멸망했다. 철기 시대의 시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유일신 종교, 화폐, 제철 기술, 그리스 알파벳, 도시 국가, 민주주의, 예루살렘, 그리고 클라인이 저서에서 끝없이 강조하는 것처럼 “다시 일어서기”에 대한 찬양이 이 시대의 교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람세스 3세는 기원전 1177년 바다민족을 힘겹게 격퇴했다. 그리고 고작 20년 후 그의 아내와 아들이 주도한 ‘하렘 암살’에 의해 기도가 잘려 사망했다. 선황제 람세스 2세는 결국 퍼시 셸리의 시에 나오는 ‘오지만디아스’처럼 사토 위의 ‘거대한 잔해’로 버려지게 되었다. 제국 이집트도 식량 부족, 궁정의 음모, 정치적 분열, 남쪽 국경에 대한 압박을 겪으며 오지만디아스와 같은 길을 걸었다. 적응도 변화도 하지 못한 채 청동기 시대의 초강대국은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를 주름잡던 히타이트 제국도 무너졌다. 서쪽 해안에서는 바다민족, 동쪽 국경에서는 아시리아과 양면전선을 형성한 히타이트는 “여러 정치 단체와 다양한 민족”이 난립한 15개의 작은 “신히타이트”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이 히타이트 장군 우리야의 아내인 밧 세바와 결혼하는 등 이후로도 히타이트의 문화는 남아있었지만, 제국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는 허허벌판이 되었고, 청동기 시대의 기축문자였던 히타이트 설형문자는 사멸했다.
바빌로니아 제국과 아시리아 제국은 가뭄과 기근, 전염병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부활했다. 구 바빌로니아의 인구는 감소했고, 구 아시리아의 기록은 기원전 1100년대 중반에 끝났지만, “신 바빌로니아”와 “신 아시리아” 제국은 구 제국의 문화적 연속성, 정부 역량 및 군사력을 유지했다. 클라인은 바빌론 4왕조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엘람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을 완전히 박살내는 바람에 “문서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고 적었다. 신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도서관을 세우고 수많은 기록을 재개했을 때, 가뭄으로 떠돌이가 된 아람인들이 아시리아의 도시를 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이 유목민의 언어인 아람어는 철기 시대 근동의 공용어가 되었다.
그리스 본토, 크레타 섬의 미케네와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110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근동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그 결과 스스로를 기록할 수 있는 문자가 사라지게 되고, 문명의 “생존자, 다른 말로 부랑자”들만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근근히 살았다고 한다. 찬란한 청동기 시대에 대한 기억은 호메로스에게까지는 구전으로 기억되었지만 그리스 문명이 제기하기까지는 수 세기가 걸렸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에 발생한 대규모의 정치적 사회적 체제 붕괴는 오히려 각 도시에 ‘공간’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리스 전역에 도시국가는 이러한 공백으로부터 탄생했다. 청동기 시대, 이집트의 속주였던 가나안 땅은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 더 나중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도시국가연맹으로 재탄생했다.
페니키아인과 키프로스인은 새로운 집단 중 가장 “탄력적”으로 성공한 집단이다. 클라인은 항해에 능했던 페니키아인들을 지중해 제국의 기초를 닦은 이들로,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진 키프로스인들을 “이 시대의 위대한 혁신 중 하나”를 이룩한 자들로 평가하며, 그리스 알파벳의 발명에 비견한다. 어쩌면 키프로스인이 셈어 문자를 그리스에 전달해주는 상업적 매개체였을까? 가나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니키아나 필리스티아 사람들처럼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착한 것일지, 아니면 출애굽기에 나온 것처럼 제국의 붕괴를 틈타 탈출한 이주민인 것일지. 이 책에는 이러한 흥미로운 질문이 많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말합니다. 키프로스인들은 셈어 문자가 그리스 문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알파벳의 상업적 통로의 중개자였던 것일까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니키아 동맹국들처럼 “탄력적이고 혁신적인” 가나안 사람들이 “새로운 표준”에 적응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출애굽기의 기록처럼 지역 붕괴를 악용한 이주민들이었을까요? 이 매력적인 책은 이러한 흥미로운 질문을 많이 제기합니다. 클라인의 책 “기원전 1177년”과 “기원전 1177년 그 이후”를 통해, 아득히 멀지만 한 편으론 공감가는 시대를 이해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