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men’s Endless Wars

끝나지 않는 예멘의 전쟁

외부 세력들의 장기말이 되어 백 년이 넘는 반란과 내전의 나날을 겪고 있는 예멘의 현재

  • 2021-05 Issue 5


벤 존스 작품

건조한 산악 지형. 무주공산에 띄엄띄엄 흩어진 소도시. 예멘은 반란이 일어나기 좋은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예로부터 역도의 땅이라고 불렸다. 물론 고대에는 사바족의 고장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시바 여왕이 바로 이 예멘을 다스렸다는 설도 있으며, 로마인들이 이 땅을 아라비아 펠릭스, 즉 행복으로 가득한 아라비아 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비옥한 곳이었다. 아랍인이 주요 인종으로 구성된 이 땅은, 다른 아랍지방이 그러하듯 오랜 세월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었다. 이 땅에 현대의 풍파를 불러온 시작은 1937년 영국이 항구 도시 아덴(1967년 독립 이후 남예멘)을 식민지로 삼으면서부터다. 영국은 아덴을 통해 중동에 막대한 힘을 전횡했다. 무스카트와 오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북예멘이 군주제를 유지하며 이맘 직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 알 사우드 가문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세습 군주가 되도록 미국과 함께 도왔다. 지금 시점에서 남북 예맨은 수니파가 아슬아슬하게 과반을 넘긴 상태로 통일되었지만, 구-북예멘 지역에 자이디 시아파 가 상당한 영향을 갖고 있다.

1990년에 이루어진 통일 이후, 역대 예멘 정부의 기조는 한결같았다. 단일국가로서의 완성. 하지만 예멘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지난 100년간 벌어진 북부 예멘의 게릴라전은, 서두에서 언급한 예멘의 별명이 최소한 틀린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 고질적인 내전은 항상 비슷한 세력에 의해 비슷한 구도로 흐르고 있다.

집단의 수장들인 후세인 바드레딘 알 후티(1959~2004)와 압둘-말릭 알 후티(1979~현재)의 이름을 따 후티 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조직, 자칭 안사르 알라(신께 향하는 자들)는 가장 최신의 북예멘 반란 집단이다. 1960년대 당시 아랍 공화국 (UAR) 대통령 가말 나세르가 벌인 예멘 침공 전쟁을 방어하고, 그 뒤로도 수많은 내외부의 적들과 싸웠던 거대 무장세력이 그 전신이다.

타국에서 온 전문가

이런 거대 무장세력이 생겨날 수 있던 비결은 바로 외부 지원에 있었다. 오늘 날 후티 운동과 마찬가지로, 당시 군도 외세로부터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전투물자와 군사교육을 받아왔다. 현대 후티 운동의 후원자가 이란이듯, 1962~70년 북예멘 내전 당시 활약한 무장세력의 후원자는 영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북예멘 내전의 서막은 1962년 9월 19일 벌어진 쿠데타였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되며 만들어진 아랍 연합 공화국은 주변 아랍 국가들로의 확장을 통해 거대 아랍 공화국을 세우려 했고, 그를 위해 북예멘의 군부를 후원했다. 이집트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들은 공화국 대통령 나세르의 후원 군자금을 이용해 새로 즉위한 북예멘의 왕이자 이맘인 무함마드 알 바드르를 한 순간에 폐위시켰다.

알 바드르는 자이디 시아파의 수장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폐위된 지 단 몇 주도 채 되지 않아 이집트의 시아파가 모여들어 거대 저항 세력이 결성되었다. 10월 경에는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신정부군은 물론 신정부의 후원자인 이집트군에까지 기습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사우디의 후원이 시작되자 알 바드르와 시아파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알 바드르는 1964년에 아예 사우디 영토 내에다 망명 정부를 수립했으며, 사우디 왕실로부터 무기와 자금, 군사고문과 훈련병을 지원받았다.

분쟁이 길어질수록 이집트는 불리해졌다. 특수 부대 몇 부대와 군사고문으로 시작된 62년의 지원은 65년에는 6만 군세에 달하는 거대 군사력으로 확대되었다. 사우디에 비해 압도적이었던 공군을 활용해 시아파의 군사기지, 시아파 마을, 사우디-예멘 간 국경에 매일같이 폭격을 퍼부었다. 지상에서는 약탈을 통해 군비를 충당했고, 각종 전쟁범죄가 판을 쳤으며, 예멘 본토인을 가혹하게 학정했다.

이 비효율적이고도 끔찍한 전쟁은 공화국 군부 내에서조차도 "이집트식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나세르 본인도 1967년 미국 대사와의 접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난 단지 예멘에 1개 중대를 파견했을 뿐인데, 정신 차려보니 7만 병력이 예멘에 가 있었다"고 말했다. 북예멘에서 전사한 1만 군사 때문에, 이집트는 이 전쟁을 도무지 끝낼 수 없었던 것이다.

1956년 수에즈 운하 분쟁 당시 나세르는 소련의 후원을 받아 영국과 적대했었다. 그 때부터 힘을 받은 나세르 독재 정권은, 영국 정부,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덴, 영국의 동맹이던 사우디 아라비아에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화국에 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면 아래에서

때문에 영국의 북예멘 내전 개입은 영국 공수특전단(SAS) 창설자 데이비드 스털링 같은 특수전 정예 장교들과 보수당의 중역 줄리안 애머리 등 소수의 정치인의 협업 하에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들은 1916~1918년 아랍 반란 당시 T. E. 로렌스의 전술과 2차대전 당시에 활용된 전술을 거의 그대로 참조해 전선을 조직했다.

자금은 사우디가 지원했으며, 병력의 일부를 벨기에와 프랑스 용병으로 충당했지만, 작전 자체는 영국의 독자적 고안에 따랐다고 한다. 20세기 말 BBC 인터뷰에 나온 당시 SAS 중령 조니 쿠퍼는 그 때 현역 군인들이 제대 후 프리랜서 자격으로 대 이집트 작전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쿠퍼 중령은 이를 두고 국제 작전이라 칭했다.

아랍군에게 보급 물자를 수송하고, 훈련시키고, 또 이집트군에 대한 기만 전략의 일환으로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매복하고 하는 건 일상이었죠… 일부 박격포 공격과 호송 부대 총격같은 전면전도 있었지만… 우린 이집트를 완벽하게 봉쇄했었습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당시 SAS 소령 버나드 밀스는 참전 소감을 ‘흥미진진했’다고 설명하며, ‘늘 열세였던’ 예멘군이 제대로 된 지휘를 통해 이집트 정규군을 상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이집트군의 사상자 비율이 높은 것은 예멘의 게릴라 민병대가 산악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매복전술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연속된 매복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 이집트는 더 많은 병력을 파견했지만, 주둔지에 도달한 병력은 출발 당시의 1/4 뿐이었다.

영국은 1966년부터 국제 작전을 중단했고, 이집트는 1967년 이스라엘과 6일전쟁을 벌이며 예멘 지원을 중단했다. 그 뒤로도 3년을 더 지지부진한 전쟁을 지속하던 북예멘은 결국 이맘 휘하의 시아파가 승기를 잡았고, 공화당 장교들과 시아파 지도자들이 고루 포함된 연정 체제의 정부가 들어섰다.

1990년 남북 통일 당시 북예멘의 수장은 1962년 내전에 참가해 반 이맘 파 소속 군인이었던 알리 압둘라 살레였다. 이맘을 지지했던 자이디 시아파와 북부 부족들은 이런 통일정부에 대해 2004년부터 반대해 왔으며, 반 통일 시위는 결국 후티 운동이라는 세력에 의해 본격적 내전으로 번져갔다.

살레는 시위 무력 진압에 대한 책임으로 2012년 퇴임했다. 후임자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는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에 망명 정부를 수립한 뒤 대항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멘 망명정부는, 후티 운동은 그 시작부터가 이란의 사주를 받은 단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초기엔 교육, 훈련, 물자를 제공했으며 점차 광범위한 시위, 내전을 유도해 예멘을 피바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동 전역에 친 이란파이자 매파인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이란의 평소 대외활동에 부합된다.

2020년 1월 암살로 사망하기 전까지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 산하 쿠드스군 수장인 가셈 솔레이마니 소장이 예멘 작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쿠드스군은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예멘 등지 전역에 대리군을 조직해두었으며, 쿠드스군 장교들 역시 저 국가들의 국기를 동시에 걸어두고 경례한다.

이란의 지원에 힘입은 후티 운동은 오랜 내전 끝에 예멘 주요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감행할 수 있었다. 2014년부터는 하디 대통령을 실각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내전이 절정에 달하자 혁명위원회와 최고정치위원회를 설립해 후티 독립 정부를 선포했다. 국제적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통일대통령이었던 살레의 지지선언을 받은 뒤 기세가 오른 후티는 옛 수도 사나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단 살레는 2017년 지지를 철회하자마자 암살당했다.

한편, 사우디가 하디를 지원해 후티를 공격하는 방식은 1960년대 당시의 패배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바로 공중 폭격이다. 이 내전에서 아랍 에미리트 연방, 쿠웨이트, 바레인 등의 무슬림 국가들의 외교적 입장은 사우디에 대한 입장 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그림자도 분명하게 보이지만 그 역할은 제한적이다.

타락과 야만의 땅

기나긴 예멘의 내전은 말 그대로 도덕적 재앙이었다. 21세기 최악의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며 사태가 더욱 악화되기도 했다. 하물며 그 전염병은 아주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질환들이다. 과도하게 길어진 전쟁 때문에 군대의 행보 역시 더욱 잔혹하게 변해가고 있다.

이란의 개입은 기존의 전쟁과 큰 차별점을 두고 있다. 후티군은 이제 대도시를 공습할 수 있는 장비와 훈련도를 갖추고 있으며, 항구 도시 호데이다에서 사우디 연합군을 방어하고, 하디 정부의 유일한 통치 지역인 마리브 주로 진격할 수 있을만큼 강해졌다.

후티가 예멘의 절대강자라고 말하기엔 이르지만, 지금 예멘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일 것이다. 이란의 지원 하에 하디 정부령, 사우디의 항구와 정유 시설 등지에 미사일 폭격을 가하고 자폭 드론을 날리고 있다. 이란이 생산한 미사일을 끊임없이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를 향해 발사하고 있다. 다행히도 사우디의 방공 시스템에 요격되고 있지만, 2020년 말엔 하디 정부 내각이 탑승한 비행기가 아덴에서 미사일 요격을 당해 전원 사망하기도 했다.

예멘 내에서는 이렇듯 후티가 지리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결국 내전의 최종 승자는 더 많은 외세 협력을 이끌어내고 유지하는 쪽에 달렸다. 하디와 후티, 둘 중 마지막에 웃는 자를 정하는 것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란 중 누가 더 오래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지가 판가름할 것이다.

Original Article Link

Yemen’s Endless W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