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mpeii’s Newly Unearthed Banquet Hall Is a Wonder

경이로운 폼페이의 연회장

베수비오 산 그늘에서 최근에 발견된 연회장, 트로이 전쟁을 앞둔 장면을 담은 환상적인 프레스코화가 그대로 보존돼.

2024-04-16 18:19 ET


최근 발견된 폼페이의 연회장 / AP

폼페이는 얼마나 신비로운가.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의 참상과 필사적인 도시민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모습은 1772년 폼페이의 첫 발굴 당시 사람들을 충격과 경악에 빠뜨렸다. 발굴단은 최선의 노력을 다 했지만, 기술의 부족으로 익명의 한 여성의 가슴 한 점 만을 발굴해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보존되어 지역 박물관에 전시된 이 유방은 19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테오필 고티에의 소설 ‘아리아 마르첼라’에 영감을 주기도 하며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비록 해당 유골은 이미 사라졌지만, 폼페이는 고고학 유적지의 대명사로 굳건히 남아 있으며,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 동물의 석고상, 생동감 넘치며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춘화까지 다양한 유물들로 매번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놀랍게도 첫 탐사 이후 약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폼페이의 1/3은 미발굴 상태다. 초창기에 비해 놀랍도록 엄격하고 정밀해진 유적발굴절차 때문에 더욱 속도가 늦어졌기도 하다. 작년 초 폼페이 역사공원 원장 가브리엘 주크트리겔과 세계 유수의 고고학자들의 협조 하에 지난 19세기 말에 한 차례 조사되었던 비아 디 놀라 구역에 광범위한 발굴이 시작되었다. 해당 프로젝트는 이미 수 많은 성과를 내고 있는데, 지난 6월에는 납작한 빵에 치즈와 과일 등의 토핑을 얹은 프레스코화가 발견되며 최초의 피자 그림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번 달에 공개된 최근 발굴 성과 발표는 더욱 놀랍다. 메인 테마는 큼지막한 연회장인데, 백만 개가 넘는 하얀 모자이크 타일 바닥도 충분히 멋있지만, 진짜 대단한 점은 웅장한 프레스코 벽화가 완벽하게 보존된 연회장 벽이다.

지난 수 년 간 폼페이 발굴팀은 풍경, 건축물, 동물, 빵집 같은 수 많은 소재를 다룬 막대한 양의 프레스코를 발견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벽 전체를 차지한 단 하나의 그림이라는 규모를 제쳐놓더라도 주제부터가 폼페이 유일의 소재다.


아폴로와 카산드라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프레스코화. / AP

홀의 양쪽 마주보는 벽 전체는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을 다룬 것이다. 한 쪽 그림은 리라를 들고 있는 남성이 그려져 있다. 누가 보아도 아폴로 신이다. 아폴로는 화려한 의자에 기대 앉은 젊은 여성을 바라보고 있는데, 트로이 왕 프리암의 딸 카산드라일 것이다. 아폴로는 카산드라를 유혹하기 위해 예언 능력을 선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하자 예언 불신의 저주를 퍼부은 바 있다. 카산드라의 남매인 파리스가 스파르타에 방문했다가 왕비 헬레네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카산드라는 파리스 때문에 트로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했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반대쪽 벽에는 젊은 남자, 젊은 여자, 그리고 여자의 시종이 그려진 장면이다. 그림만 보아서는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을 법 했지만 화가가 친절하게도, 당시 폼페이에서 자주 쓰던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이름을 적어 두었다. AΛEΞANΔPOΣ (알렉산드로스, 파리스의 다른 이름)와 EΛENH (헬레네). 트로이 전쟁을 촉발시킬 세기의 만남이었다.

일반 관람객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놀랍도록 잘 보존된 그림의 상태다. 약간의 표면 열화가 있긴 하지만 페인트 색감은 선명했고, 반짝거린다. 반면 전문가들에게 더 인상적인 부분은, 화려한 그림과 색감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선호하던 당시 로마의 화풍과는 전혀 대비되는, 새까맣고 아무 것도 없는 배경이다. 미술사학자들의 일용할 양식 삼을 만 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프레스코화의 다른 한 장면 / AP (역자 주: 파리스는 양치기 출신이다. 때문에 그림에선 양치기 개와 목동 지팡이가 그려져 있다. 헬레네 역시 몸종이 스파르타의 상징인 창촉을 들고 있다.)

19세기 이래로 사학자들은 로마의 미술사조를 파악하기 위해(대부분은 폼페이 발굴결과를 기반으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연대를 기준으로 크게 4개의 분류와 각 소분류를 정립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분류가 너무 치밀하고 세밀하다고 주장하는 회의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번 발굴과 같은 사례가 기존의 분류와 타임라인에 상당히 변화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바탕 장식이 없는 그림은 분류에 포함시킬 수 없다). 일단 발굴팀은 명확하고 쉬운 가설을 제시했다. 기름을 떼는 등유 램프의 그을음을 가리기 위해 벽을 전부 검게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이번 논쟁은 학계가 늘 그래왔듯 격렬하게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우리같은 일반인은 그저 예술의 불변성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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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peii’s Newly Unearthed Banquet Hall Is a Wonder

Genome study reveals prehistoric Ethiopian origins of coffee

선사시대 에티오피아에서 밝혀지는 커피의 기원

  • 2024-04-16

아침의 묘약, 인생의 쓴 맛, 마시는 향기,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각성제. 세계 어디서라도 커피는 음료 문화에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아라비카 원두를 로스팅한 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최근 과학자들이 아라비카 커피의 유전자를 분석하여 기원을 찾아나섰다. 61만~100만 년 전 에티오피아의 깊은 숲 속, 서로 다른 두 종의 커피가 자연 교배한 결과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커피는 인류보다 오래된 선배인 셈이다.

18세기에 생산된 원두 표본을 포함한 총 39종의 아라비카 품종의 염기서열을 분석하여 아라비카 커피 (Coffea arabica) 의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 아라비카의 근원은 물론 농사에 중요한 육종 특성이나 질병 저항성에 대한 데이터 등도 확인할 수 있었다.

Nature Genetics지에 실린 이번 연구를 이끈 뉴욕 버팔로 대학 식물진화학자 빅토르 알버트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연구취지를 밝혔다.

“아라비카 커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부가가치 작물 중 하나입니다. 농경국가의 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단순히 글로벌 대기업에 의해 착취되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 각 지역의 소규모 농경인의 생계를 사실상 책임지고 있습니다. 커피가 가진 항산화 성능은 물론 카페인의 확고한 성능 덕분에 전세계인의 아침 각성을 도와주니까요.”

아라비카의 개체수는 지난 수십만 년간 기후의 변화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하며 번성했다. 이후 에티오피아와 예멘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후 급격히 세계로 퍼져나갔다.

네슬레 연구소의 유전체학 박사이자 스위스 연방공과대 교수인 패트릭 데스콤브는 이번 연구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커피와 인류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커피 생산국가에서 커피는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문화와 전통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카는 비교적 적은 개체군을 유지해왔으며, 농경 역사동안 근친 교배를 반복해 왔기 때문에 유전적 다양성이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해충과 질병에 취약하고, 기후 조건을 까다롭게 따지기 때문에 한정된 지역에서만 재배 가능하다.

“커피의 새로운 육종 방식을 개발해 궁극적으로 기후 변화, 질병으로부터 저항성을 갖추고 새로운 맛과 향을 가진 품종을 개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커피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음료로서 매일 22억 5천만 잔이 소비된다. 이 중 대부분은 아라비카 커피다.

연구진은 아라비카가 로부스타 커피(Caffea canephora)와 케냐 고산 커피(Caffea eugenioides)의 자연적 교배로 발생된 것으로 판단했다. 로부스타 커피는 2014년에 게놈 지도가 분석된 종이다.

로부스타는 인스턴트 커피에 주로 사용된다. 아라비카보다 덜 부드럽고 풍미도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프리카의 적도 인근 숲에서 자란다.

“로부스타는 병충해에 아주 강하고 질병내성도 뛰어납니다. 이름 그대로 견고(Robusta)하죠.”

케냐 고산 커피는 야생 커피로서 케냐의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이번 연구에 사용된 18세기 표본은 스웨덴의 박물학자 칼 린네가 커피 종을 분석하는 데 사용했던 표본으로써 런던에 보관중이었다.

알버트 박사는 “케냐 고산 커피의 염기 서열을 분석한 결과 오늘날 재배 중인 품종과 특별히 밀접한 연관성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며 말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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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ome study reveals prehistoric Ethiopian origins of coffee

‘After 1177 B.C.’ Review – How the Bronze Age Turned Iron

‘기원전 1177년 그 이후’ 리뷰: 청동기는 어떻게 철기가 되었나

지중해를 둘러싼 세상의 적응과 변화 – 혹은 쇠퇴와 멸망.

  • 2024-04-15 12:15 ET

근동과 에게해, 즉 이집트와 그리스, 페르시아라 부르던 고대 유럽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3000년 경에 시작되어 기원전 1500년대에 정점을 찍고, 기원전 1200~1100년대에 급격히 붕괴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집트 제국은 영구적인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며, 히타이트 제국은 무너졌고, 아시리아와 바빌론도 무사하지 않았다. 미케네, 미노스, 가나안은 아예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리스 본토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고, 문학이라는 건 물론 정치체계에 대한 개념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 헤시오도스가 “철의 시대”라고 명명한, 무지와 전쟁, 빈곤의 시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한 때 역사가들은 기원전 1177년에 발생한 대침공, 이집트인들이 바다민족이라 기록했고, 후대의 그리스인들이 도리아인이라 부른 거대 유민들의 이동에 의해 청동기가 멸망했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한 순간의 대침공은 없었다는 학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민족이 동부 지중해로 건너왔는데, 몇몇은 땅을 가로질러, 몇몇은 평화롭게, 대다수는 가뭄과 기아로 인해 정착지를 옮긴 것이다. 이 몇 세기에 걸친 대 이동 과정에서 스스로를 바다민족이나 그리스인으로 자칭한 민족은 없었다. 이집트의 멸망에서 외부의 침습은 그저 한 가지 이유일 뿐, 남부 국경에서의 외교적 불안정, ‘비이집트인’의 무덤 도굴 사태, 정치인들의 붕당화 같은 일들이 난적해있었다.

에릭 H. 클라인의 2014년 저서 “기원전 1177년: 문명이 무너진 해”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시스템의 실패에 따른 도미노 효과와 기하급수적 스노우볼”로 설명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고전인류학 교수이기도 한 클라인은 복잡성 이론과 시스템 분석을 활용해 청동기-철기 전환기를 분석했다. 지중해 세계를 둘러싼 각 제국의 경제체제는 아주 정교했고, 상호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사건에 대해 불규칙적이면서도 비선형적으로 증폭되는 연쇄 상호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1177년 바다 민족의 이집트 침공은 서기 476년 로마가 당한 게르만 민족 대이동과 비슷하게, 쇠퇴의 증거이자 핵심사건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전환은 그저 ‘흘러가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강력한 청동기 시대의 제국이 무너지고 초기 철기 시대의 도시 국가들이 결속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역사는 연속적이다. 클라인은 올해 새로운 저서 “기원전 1177년 그 이후”에서 “침공”이 아닌 그 이후를 설명했다. 헤시오도스는 이 시기를 두고 “끔찍한 고통의 시대”라고 단언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중에도 분명 악에 섞인 선이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후기 청동기 사회는 다가올 미래에 적응하고 변화하거나, 멸망했다. 철기 시대의 시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유일신 종교, 화폐, 제철 기술, 그리스 알파벳, 도시 국가, 민주주의, 예루살렘, 그리고 클라인이 저서에서 끝없이 강조하는 것처럼 “다시 일어서기”에 대한 찬양이 이 시대의 교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람세스 3세는 기원전 1177년 바다민족을 힘겹게 격퇴했다. 그리고 고작 20년 후 그의 아내와 아들이 주도한 ‘하렘 암살’에 의해 기도가 잘려 사망했다. 선황제 람세스 2세는 결국 퍼시 셸리의 시에 나오는 ‘오지만디아스’처럼 사토 위의 ‘거대한 잔해’로 버려지게 되었다. 제국 이집트도 식량 부족, 궁정의 음모, 정치적 분열, 남쪽 국경에 대한 압박을 겪으며 오지만디아스와 같은 길을 걸었다. 적응도 변화도 하지 못한 채 청동기 시대의 초강대국은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를 주름잡던 히타이트 제국도 무너졌다. 서쪽 해안에서는 바다민족, 동쪽 국경에서는 아시리아과 양면전선을 형성한 히타이트는 “여러 정치 단체와 다양한 민족”이 난립한 15개의 작은 “신히타이트”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이 히타이트 장군 우리야의 아내인 밧 세바와 결혼하는 등 이후로도 히타이트의 문화는 남아있었지만, 제국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는 허허벌판이 되었고, 청동기 시대의 기축문자였던 히타이트 설형문자는 사멸했다.

바빌로니아 제국과 아시리아 제국은 가뭄과 기근, 전염병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부활했다. 구 바빌로니아의 인구는 감소했고, 구 아시리아의 기록은 기원전 1100년대 중반에 끝났지만, “신 바빌로니아”와 “신 아시리아” 제국은 구 제국의 문화적 연속성, 정부 역량 및 군사력을 유지했다. 클라인은 바빌론 4왕조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엘람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을 완전히 박살내는 바람에 “문서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고 적었다. 신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도서관을 세우고 수많은 기록을 재개했을 때, 가뭄으로 떠돌이가 된 아람인들이 아시리아의 도시를 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이 유목민의 언어인 아람어는 철기 시대 근동의 공용어가 되었다.

그리스 본토, 크레타 섬의 미케네와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110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근동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그 결과 스스로를 기록할 수 있는 문자가 사라지게 되고, 문명의 “생존자, 다른 말로 부랑자”들만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근근히 살았다고 한다. 찬란한 청동기 시대에 대한 기억은 호메로스에게까지는 구전으로 기억되었지만 그리스 문명이 제기하기까지는 수 세기가 걸렸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에 발생한 대규모의 정치적 사회적 체제 붕괴는 오히려 각 도시에 ‘공간’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리스 전역에 도시국가는 이러한 공백으로부터 탄생했다. 청동기 시대, 이집트의 속주였던 가나안 땅은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 더 나중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도시국가연맹으로 재탄생했다.

페니키아인과 키프로스인은 새로운 집단 중 가장 “탄력적”으로 성공한 집단이다. 클라인은 항해에 능했던 페니키아인들을 지중해 제국의 기초를 닦은 이들로,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진 키프로스인들을 “이 시대의 위대한 혁신 중 하나”를 이룩한 자들로 평가하며, 그리스 알파벳의 발명에 비견한다. 어쩌면 키프로스인이 셈어 문자를 그리스에 전달해주는 상업적 매개체였을까? 가나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니키아나 필리스티아 사람들처럼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착한 것일지, 아니면 출애굽기에 나온 것처럼 제국의 붕괴를 틈타 탈출한 이주민인 것일지. 이 책에는 이러한 흥미로운 질문이 많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말합니다. 키프로스인들은 셈어 문자가 그리스 문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알파벳의 상업적 통로의 중개자였던 것일까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니키아 동맹국들처럼 “탄력적이고 혁신적인” 가나안 사람들이 “새로운 표준”에 적응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출애굽기의 기록처럼 지역 붕괴를 악용한 이주민들이었을까요? 이 매력적인 책은 이러한 흥미로운 질문을 많이 제기합니다. 클라인의 책 “기원전 1177년”과 “기원전 1177년 그 이후”를 통해, 아득히 멀지만 한 편으론 공감가는 시대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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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1177 B.C.’ Review: How the Bronze Age Turned Ir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