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s the Trojan Horse Real?

트로이 목마는 실화였을까

거대한 나무 말에 탄 채 도시에 잠입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 2024-03 Issue 3


675년 경에 제작된 미코노스 꽃병, 트로이 목마가 묘사되어있다 / akg-images

1873년 독일인 유적 사업가이자, 이젠 고고학자로도 이름을 남긴 하인리히 슐리만이 터키 히살릭에서 거대한 대도시 유적을 발견한 뒤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행적, 트로이의 존재는 사실로 밝혀졌다. 일리아스의 내용 전체는 몰라도, 기원 전 1275~1260년 부근에 파괴된 성벽이 발견되었다. 물론 이 파괴가 진짜 전쟁 때문인지, 자연재해 때문인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가장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말이다. 이 전쟁의 주인공이 진짜 말이었던 것인지, 비유되는 상징인 것인지, 그냥 박진감 넘치는 창작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수많은 학자들이 이미 각종 학설을 제시해왔다. 말의 정체는 공성탑이나 파성추 같은 공성무기다. 아니다, 지진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은유다. 그리스 본토에서 온 추가 병력에 대한 비유다 등등. 실제로 호메로스는 자신의 작품에서 배를 두고 "심해를 달리는 말"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비슷한 그리스 극작가 에우리피데스 역시 말과 배를 동일시한 비유를 자주 사용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진짜 말"이 아니라고 치부하기엔, 일리아스 속 묘사가 너무 과도하게 현실적이었다. 유적과 사료 만으로도 말을 제작한 당사자 (에페이우스), 말을 만들기 위해 목재를 벌목한 곳 (이다 산) 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말을 활용한 방법도 전쟁을 모르는 시문학가의 상상이라기엔 너무 정밀했다. 바퀴를 달았고, 아마 섬유로 꼰 밧줄로 성 안까지 끌고 들어갔으며, 꼬리와 무릎, 눈이 실제로 움직였다고 한다. 후대에는 내부에서 옆구리 쪽 문을 열 수 있었으며 밧줄이나 그에 준하는 줄사다리를 타고 드나들 수 있었다는 묘사까지 나왔다.

말에 탑승한 전사들에 대해서는 작가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몇몇 영웅들은 공통적으로 등장하지만 정확한 숫자가 문제다. 침투조는 모두 몇 명이었을까. 위대한 용사 30인? 50인? 100인? 물론 목재 말에 3000 명이 탑승해 있었다는 어떤 기록은 소설적 과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명이 탑승했던지 간에 목마의 내부는 굉장히 혼잡했을 것이고, 갑옷과 무기가 서로 부딪혀 덜그럭거렸을 것이다.

병력의 규모나 무기의 소음같은 잡다한 문제를 다 제쳐두더라도, 한 가지는 명확하다. 이 작전이 절대 상식적인 작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작전은 얼마나 (그리스스러우면서도 오디세우스스럽게) 트로이인을 잘 속여 넘기느냐에 성패가 달려있었다. 목마 전략은 단 한 번 밖에는 사용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마지막으로, 왜 하필 말 모양의 조각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말이라는 동물이 상징하는 바가 있었던 것일까. 선물상자처럼 간단한 모양이 아니고, 타고 있던 배를 건져올려놓은 것도 아니고, 왜 하필 말이었을까.

트로이 전쟁이 진행되던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지중해 근방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이 바로 말이었다. 여행 수단을 넘어 교통 수단으로 기능했으며, 부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기능했다. 전차를 모는 그리스 전차병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말을 잘 다루는 것은 그 자체로 전쟁 기술이자 경력이었다.

트로이 전쟁보다 500년 정도 흐른 뒤에 지어진 일리아스에는, 트로이인이건 그리스인이건 수 많은 영웅들이 말을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양국의 수 많은 영웅들은 말과 관련된 이름(히파소스, 히포다마스, 히포마코스 등의 hippo 돌림자. hippo는 그리스어로 말이다)을 갖고 있다. 특히 트로이인들이 말과 아주 밀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메로스는 트로이가 대규모 말 사육업을 했다는 이유로 트로이인을 "말 조련사"라고 칭했다. 말 그대로 목마는 말의 도시에 말의 형태로 들어온 재앙 그 무언가에 대항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은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트로이 목마는 인간인 영웅 뿐 아니라 장수하는 신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으로, 지혜, 전쟁, 기마 전차술의 신인 아테나가 전쟁에 개입했다는 상징인 것이다. 아테나의 관장 분야를 모두 통합하면 말 모양 전차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 전쟁을 끝내는 지혜가 완성된다. 아테나는 에페이우스의 꿈에 현몽하여 대전략의 핵심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며, 그리스인들이 트로이에 말을 진입시킨 핑계 역시, 실제로는 트로이가 도시로 말을 끌고가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아테나 여신에 대한 공물로 바쳐 무사히 후퇴하기 위함이었다.

수 많은 고대 기록에 나타나는 그 모든 목마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수 많은 현대 학자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트로이 목마 작전에 대해 특정한 가설을 확답해 줄 수는 없다. 목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록에서 언급하는 사건이 벌어진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제는 이 일이 실제인지 비유인지, 그 중간 어딘가의 무엇인지 말할 수 없지만, 위대한 지혜와 대담한 용기, 그리고 교활한 재치가 하나로 합쳐진 에피소드로서 고대는 물론 현대와 미래에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불러일으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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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 the Trojan Horse Real?

Jackie Coogan and the Fall of Hollywood’s Child Stars

재키 쿠건, 할리우드 아역 스타의 몰락

재키 쿠건, 다이애나 세라 캐리, 할리우드가 사랑한 아역 배우들의 몰락, 스타의 실패를 막지 못한 할리우드

  • 2024-02 Issue 2


1925년 어느 날, 부모님과 함께 MGM에 찾아가 계약서에 서명하는 아역 배우 재키 쿠건, 그를 지켜보는 부사장 니콜라스 솅크 / Evertt Collection Inc. / Alamy Stock Photo

찰리 채플린의 첫 장편 영화인 The Kid (1921) 은, 무성영화 역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영화를 제작할 당시만 해도 많은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한 작품이기도 했다. 감정이 가득 담긴 페이소스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결합,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채플린은 이런 냉소에 굴하지 않았고, 다섯 살 밖에 안되는 어린 배우 재키 쿠건과 펼친 환상적인 듀엣 연기를 통해 전 세계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단숨에 스타로 거듭난 쿠건은 곧바로 차기작 올리버 트위스트 (1922)의 사랑스러운 거지 꼬마 올리버 역으로, 페이긴 역을 맡은 당시 대배우 론 채니와 함께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연달아 터진 흥행 성적 덕분에 필통, 컵받침, 도시락통, 인형 등 어디에서나 쿠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수익성 높은 굿즈 산업, 광고, 비중있는 영화 배역 덕분에 쿠건은 수 백만 달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어도 여전히 어렸기 때문에, 쿠건의 재산은 성인이 될 21세까진 부모가 관리하기로 했다. 쿠건의 부모는 매니저를 자청했는데, 굉장히 능력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성인이 되기 3년 전이던 18살, 쿠건과 부친, 외에 3명의 직원이 탑승한 차량이 샌디에고에서 교통사고를 당했고, 쿠건을 제외한 넷 모두가 사망했다. 이제 쿠건에 대한, 또 쿠건의 재산에 대한 관리 권한은 모친 릴리안, 그리고 계부 아서 번스타인에게 넘겨졌다. 세월이 흘러 21살이 된 재키 쿠건은 문득 양부와 친모의 생활을 돌이켜보다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롤스로이스와 명품, 보석으로 가득한 둘의 사치와 허세가 모두 자신의 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번스타인은 1938년 타임 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쿠건이 21세 이전에 번 돈은 모두 부모의 소유라고 분명히 정해져 있다"고 강변하며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음을 주장했다. 인터뷰를 본 쿠건은 즉각 부모를 고소했고, 이는 캘리포니아 아역 배우 보호법, 통칭 ‘쿠건 법’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모든 아역배우가 수입의 15%를 신탁기금에 적립하도록 규정된 쿠건 법은 이론적으로는 부모나 다른 대리 재정관리자가 무책임하게 자산을 낭비하지 못하도록 막아 아역배우의 권리를 보호해준다는 취지였다.


재키 쿠건과 찰리 채플린, The Kid 의 홍보용 스냅사진 / J. Willis Sayre Collection of Theatrical Photographs / 워싱턴 대학교 / Public Domain

하지만 당시 여자 판 재키 쿠건이라 불리며 라이벌리티를 형성했던, ‘베이비 페기’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배우 다이애나 세라 캐리는, 회고록이자 전기문 "Jackie Coogan : The World’s Boy King" 에서 당시 이 법안이 얼마나 쓸모없었는지를 설명했다. 부모, 매니저의 탈을 쓴 날강도 들이 법의 보호를 피해 미성년자의 신탁 기금을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쿠건의 재판이 진행 중일 때, 캐리 역시 모친과 통화를 했는데, 모친은 "이제 너도 나와 네 애비한테 똑같은 짓을 하겠구나" 라며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실제로 10대가 되기 전에 150편이 넘는 단편 코메디와 3편의 장편 영화를 찍은 캐리는, 그 수입의 거의 전부를 버는 족족 허공에 흩뿌린 것이나 다름없는 부모의 낭비로 날리게 되었다. 소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캐리가 부모와 법적 공방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이유로 캐리는 이런 과거를 널리 알리고,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고, 위대한 작가이자 영화역사학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역 배우의 권익 보호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한 캐리는 1990년 출범한 비영리 단체 ‘자그마한 배려’의 창립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자그마한 배려’는 폴 피터슨이 엔터 업계에서 활약하는 모든 미성년자를 보호하자는 취지로 설립한 비영리 단체다. 폴 피터슨 역시 아역배우로서 1950년대 ‘도나 리드 쇼’에 출연했는데, 라이벌 방송인 ‘Make Room For Daddy’의 아역 배우 러스티 해머가 자살한 것을 계기로 아역 권익 보호 활동에 눈뜨게 되었다. 이후 수 십년간 쿠건 법의 허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개정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90년 비영리 단체를 출범한 것이다. 캐리는 피터슨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물심양면으로 지지해주었고, 마침내 2000년, 엔터 업계에서 활약한 미성년자의 수입의 소유권이 온전하게 자녀 고유의 것일 뿐 부모의 것이 아니라는 판례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60여 년 간의 공백 기간동안, 재키 쿠건이 겪었을 심적 고통은 수 차례 되풀이 되곤 했었다. 대 스타 주디 갤런드의 모친은 딸이 번 돈 중 일부를 매니지 월급으로 정산 받는 방식으로 법망을 회피했다. 4년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던 만인의 연인 셜리 템플은 부친의 유산을 열어봤더니 먼지만 가득했었다. 80년대 대 스타 제나 말론과 코리 펠드먼을 비롯한 많은 아역 배우들이 부모의 형편없는 자금 관리와 막대한 빚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다행히 몇몇은 이런 합의를 원만하게 이루기도 했지만, 아동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노동법 규제를 회피하고자 한 엔터 회사들이 고의적으로 부모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판례 이후 이런 일은 줄어들었지만, 20년이나 지난 현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쿠건 법을 더욱 개정해 새로운 방식으로 착취당하는 ‘온라인 아동 인플루언서’에 까지도 법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법망을 피해 자신의 아들딸을 착취한 부모, 방기한 업계 탓에 수많은 아역 스타들이 저물어갔다. 이런 사례가 누적되다 보니 ‘할리우드 아역’이라는 고정관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아역 시절의 모든 커리어를 ‘망한 인생’ 으로 규정짓고, 성인이 된 이후를 ‘모든 풋풋함을 잃고 못알아보게 변해버린’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재키 쿠건이 이런 선입견의 첫 사례였다. 1964년 시트콤 ‘애덤스 패밀리’에서 코믹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섬뜩한 캐릭터 ‘페스터 아저씨’ 역을 맡아 스크린에 복귀하게 된 쿠건은, 자신을 사랑해 줄 관객들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하지만 그의 딸이 회상한 아빠의 복귀는, ‘예전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였지만 지금은 끔찍한 괴물로 남았다’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슬픈 모습 뿐이었다. 하지만 캐리가 전기문에 기록했듯, 쿠건은 이런 모든 사건, 선입견으로 스스로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을 굉장히 아름다운 시절이라 표현했으며, 다른 아역 스타들을 위해 ‘지치지 않는 치어리더’로서 열정적인 응원을 거듭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쿠건은 그저 이 세상이 악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몰랐던 옛날이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38년 법정 공방이 지속되는 동안 언론과 여론은 쿠건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유지했지만, 제작사와 업계에선 쿠건의 행위를 배은망덕으로 규정했다. 하물며 MGM의 사장 루이스 B. 메이어는 "어떤 파렴치한 놈도 자기 엄마를 고소하진 않는다"며 쿠건의 면전에 대고 화를 내기도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어른들 때문에 힘든 세월을 겪은 쿠건이, 세상 누구보다 믿음직한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묘사한 영화 덕분에 스타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씁쓸한 아이러니이다. 영화 ‘The Kid’ 에서 쿠건의 배역 "꼬마"는 채플린의 배역인 "양아버지 트램프" 덕분에 삶의 위안을 얻게 된다. 하물며 트램프는 꼬마를 맡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지만, 단지 꼬마가 불쌍했고, 꼬마를 위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선행을 했을 뿐이었다. 채플린은 실제로도 쿠건이 소송전에 돌입했을 때 쿠건에게 1,000 달러라는 거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 맘 때 쯤엔 채플린이 한창 새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쿠건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촬영 현장에 찾아갔다. 짧게 서로의 안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쿠건이, 사실 자기는 너무 어려서 The Kid를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자(시사회 때도 중간에 잠들었다), 채플린은 즉각 당일 촬영을 모두 중단시키고, 직접 쿠건을 상영실로 데려가 오르간을 연주해주며 영화를 모두 볼 수 있도록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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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ie Coogan and the Fall of Hollywood’s Child Stars

Yemen’s Endless Wars

끝나지 않는 예멘의 전쟁

외부 세력들의 장기말이 되어 백 년이 넘는 반란과 내전의 나날을 겪고 있는 예멘의 현재

  • 2021-05 Issue 5


벤 존스 작품

건조한 산악 지형. 무주공산에 띄엄띄엄 흩어진 소도시. 예멘은 반란이 일어나기 좋은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예로부터 역도의 땅이라고 불렸다. 물론 고대에는 사바족의 고장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시바 여왕이 바로 이 예멘을 다스렸다는 설도 있으며, 로마인들이 이 땅을 아라비아 펠릭스, 즉 행복으로 가득한 아라비아 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비옥한 곳이었다. 아랍인이 주요 인종으로 구성된 이 땅은, 다른 아랍지방이 그러하듯 오랜 세월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었다. 이 땅에 현대의 풍파를 불러온 시작은 1937년 영국이 항구 도시 아덴(1967년 독립 이후 남예멘)을 식민지로 삼으면서부터다. 영국은 아덴을 통해 중동에 막대한 힘을 전횡했다. 무스카트와 오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북예멘이 군주제를 유지하며 이맘 직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 알 사우드 가문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세습 군주가 되도록 미국과 함께 도왔다. 지금 시점에서 남북 예맨은 수니파가 아슬아슬하게 과반을 넘긴 상태로 통일되었지만, 구-북예멘 지역에 자이디 시아파 가 상당한 영향을 갖고 있다.

1990년에 이루어진 통일 이후, 역대 예멘 정부의 기조는 한결같았다. 단일국가로서의 완성. 하지만 예멘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지난 100년간 벌어진 북부 예멘의 게릴라전은, 서두에서 언급한 예멘의 별명이 최소한 틀린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 고질적인 내전은 항상 비슷한 세력에 의해 비슷한 구도로 흐르고 있다.

집단의 수장들인 후세인 바드레딘 알 후티(1959~2004)와 압둘-말릭 알 후티(1979~현재)의 이름을 따 후티 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조직, 자칭 안사르 알라(신께 향하는 자들)는 가장 최신의 북예멘 반란 집단이다. 1960년대 당시 아랍 공화국 (UAR) 대통령 가말 나세르가 벌인 예멘 침공 전쟁을 방어하고, 그 뒤로도 수많은 내외부의 적들과 싸웠던 거대 무장세력이 그 전신이다.

타국에서 온 전문가

이런 거대 무장세력이 생겨날 수 있던 비결은 바로 외부 지원에 있었다. 오늘 날 후티 운동과 마찬가지로, 당시 군도 외세로부터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전투물자와 군사교육을 받아왔다. 현대 후티 운동의 후원자가 이란이듯, 1962~70년 북예멘 내전 당시 활약한 무장세력의 후원자는 영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북예멘 내전의 서막은 1962년 9월 19일 벌어진 쿠데타였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되며 만들어진 아랍 연합 공화국은 주변 아랍 국가들로의 확장을 통해 거대 아랍 공화국을 세우려 했고, 그를 위해 북예멘의 군부를 후원했다. 이집트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들은 공화국 대통령 나세르의 후원 군자금을 이용해 새로 즉위한 북예멘의 왕이자 이맘인 무함마드 알 바드르를 한 순간에 폐위시켰다.

알 바드르는 자이디 시아파의 수장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폐위된 지 단 몇 주도 채 되지 않아 이집트의 시아파가 모여들어 거대 저항 세력이 결성되었다. 10월 경에는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신정부군은 물론 신정부의 후원자인 이집트군에까지 기습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사우디의 후원이 시작되자 알 바드르와 시아파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알 바드르는 1964년에 아예 사우디 영토 내에다 망명 정부를 수립했으며, 사우디 왕실로부터 무기와 자금, 군사고문과 훈련병을 지원받았다.

분쟁이 길어질수록 이집트는 불리해졌다. 특수 부대 몇 부대와 군사고문으로 시작된 62년의 지원은 65년에는 6만 군세에 달하는 거대 군사력으로 확대되었다. 사우디에 비해 압도적이었던 공군을 활용해 시아파의 군사기지, 시아파 마을, 사우디-예멘 간 국경에 매일같이 폭격을 퍼부었다. 지상에서는 약탈을 통해 군비를 충당했고, 각종 전쟁범죄가 판을 쳤으며, 예멘 본토인을 가혹하게 학정했다.

이 비효율적이고도 끔찍한 전쟁은 공화국 군부 내에서조차도 "이집트식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나세르 본인도 1967년 미국 대사와의 접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난 단지 예멘에 1개 중대를 파견했을 뿐인데, 정신 차려보니 7만 병력이 예멘에 가 있었다"고 말했다. 북예멘에서 전사한 1만 군사 때문에, 이집트는 이 전쟁을 도무지 끝낼 수 없었던 것이다.

1956년 수에즈 운하 분쟁 당시 나세르는 소련의 후원을 받아 영국과 적대했었다. 그 때부터 힘을 받은 나세르 독재 정권은, 영국 정부,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덴, 영국의 동맹이던 사우디 아라비아에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화국에 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면 아래에서

때문에 영국의 북예멘 내전 개입은 영국 공수특전단(SAS) 창설자 데이비드 스털링 같은 특수전 정예 장교들과 보수당의 중역 줄리안 애머리 등 소수의 정치인의 협업 하에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들은 1916~1918년 아랍 반란 당시 T. E. 로렌스의 전술과 2차대전 당시에 활용된 전술을 거의 그대로 참조해 전선을 조직했다.

자금은 사우디가 지원했으며, 병력의 일부를 벨기에와 프랑스 용병으로 충당했지만, 작전 자체는 영국의 독자적 고안에 따랐다고 한다. 20세기 말 BBC 인터뷰에 나온 당시 SAS 중령 조니 쿠퍼는 그 때 현역 군인들이 제대 후 프리랜서 자격으로 대 이집트 작전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쿠퍼 중령은 이를 두고 국제 작전이라 칭했다.

아랍군에게 보급 물자를 수송하고, 훈련시키고, 또 이집트군에 대한 기만 전략의 일환으로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매복하고 하는 건 일상이었죠… 일부 박격포 공격과 호송 부대 총격같은 전면전도 있었지만… 우린 이집트를 완벽하게 봉쇄했었습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당시 SAS 소령 버나드 밀스는 참전 소감을 ‘흥미진진했’다고 설명하며, ‘늘 열세였던’ 예멘군이 제대로 된 지휘를 통해 이집트 정규군을 상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이집트군의 사상자 비율이 높은 것은 예멘의 게릴라 민병대가 산악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매복전술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연속된 매복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 이집트는 더 많은 병력을 파견했지만, 주둔지에 도달한 병력은 출발 당시의 1/4 뿐이었다.

영국은 1966년부터 국제 작전을 중단했고, 이집트는 1967년 이스라엘과 6일전쟁을 벌이며 예멘 지원을 중단했다. 그 뒤로도 3년을 더 지지부진한 전쟁을 지속하던 북예멘은 결국 이맘 휘하의 시아파가 승기를 잡았고, 공화당 장교들과 시아파 지도자들이 고루 포함된 연정 체제의 정부가 들어섰다.

1990년 남북 통일 당시 북예멘의 수장은 1962년 내전에 참가해 반 이맘 파 소속 군인이었던 알리 압둘라 살레였다. 이맘을 지지했던 자이디 시아파와 북부 부족들은 이런 통일정부에 대해 2004년부터 반대해 왔으며, 반 통일 시위는 결국 후티 운동이라는 세력에 의해 본격적 내전으로 번져갔다.

살레는 시위 무력 진압에 대한 책임으로 2012년 퇴임했다. 후임자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는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에 망명 정부를 수립한 뒤 대항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멘 망명정부는, 후티 운동은 그 시작부터가 이란의 사주를 받은 단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초기엔 교육, 훈련, 물자를 제공했으며 점차 광범위한 시위, 내전을 유도해 예멘을 피바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동 전역에 친 이란파이자 매파인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이란의 평소 대외활동에 부합된다.

2020년 1월 암살로 사망하기 전까지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 산하 쿠드스군 수장인 가셈 솔레이마니 소장이 예멘 작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쿠드스군은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예멘 등지 전역에 대리군을 조직해두었으며, 쿠드스군 장교들 역시 저 국가들의 국기를 동시에 걸어두고 경례한다.

이란의 지원에 힘입은 후티 운동은 오랜 내전 끝에 예멘 주요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감행할 수 있었다. 2014년부터는 하디 대통령을 실각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내전이 절정에 달하자 혁명위원회와 최고정치위원회를 설립해 후티 독립 정부를 선포했다. 국제적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통일대통령이었던 살레의 지지선언을 받은 뒤 기세가 오른 후티는 옛 수도 사나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단 살레는 2017년 지지를 철회하자마자 암살당했다.

한편, 사우디가 하디를 지원해 후티를 공격하는 방식은 1960년대 당시의 패배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바로 공중 폭격이다. 이 내전에서 아랍 에미리트 연방, 쿠웨이트, 바레인 등의 무슬림 국가들의 외교적 입장은 사우디에 대한 입장 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그림자도 분명하게 보이지만 그 역할은 제한적이다.

타락과 야만의 땅

기나긴 예멘의 내전은 말 그대로 도덕적 재앙이었다. 21세기 최악의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며 사태가 더욱 악화되기도 했다. 하물며 그 전염병은 아주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질환들이다. 과도하게 길어진 전쟁 때문에 군대의 행보 역시 더욱 잔혹하게 변해가고 있다.

이란의 개입은 기존의 전쟁과 큰 차별점을 두고 있다. 후티군은 이제 대도시를 공습할 수 있는 장비와 훈련도를 갖추고 있으며, 항구 도시 호데이다에서 사우디 연합군을 방어하고, 하디 정부의 유일한 통치 지역인 마리브 주로 진격할 수 있을만큼 강해졌다.

후티가 예멘의 절대강자라고 말하기엔 이르지만, 지금 예멘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일 것이다. 이란의 지원 하에 하디 정부령, 사우디의 항구와 정유 시설 등지에 미사일 폭격을 가하고 자폭 드론을 날리고 있다. 이란이 생산한 미사일을 끊임없이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를 향해 발사하고 있다. 다행히도 사우디의 방공 시스템에 요격되고 있지만, 2020년 말엔 하디 정부 내각이 탑승한 비행기가 아덴에서 미사일 요격을 당해 전원 사망하기도 했다.

예멘 내에서는 이렇듯 후티가 지리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결국 내전의 최종 승자는 더 많은 외세 협력을 이끌어내고 유지하는 쪽에 달렸다. 하디와 후티, 둘 중 마지막에 웃는 자를 정하는 것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란 중 누가 더 오래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지가 판가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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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men’s Endless W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