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kie Coogan and the Fall of Hollywood’s Child Stars

재키 쿠건, 할리우드 아역 스타의 몰락

재키 쿠건, 다이애나 세라 캐리, 할리우드가 사랑한 아역 배우들의 몰락, 스타의 실패를 막지 못한 할리우드

  • 2024-02 Issue 2


1925년 어느 날, 부모님과 함께 MGM에 찾아가 계약서에 서명하는 아역 배우 재키 쿠건, 그를 지켜보는 부사장 니콜라스 솅크 / Evertt Collection Inc. / Alamy Stock Photo

찰리 채플린의 첫 장편 영화인 The Kid (1921) 은, 무성영화 역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영화를 제작할 당시만 해도 많은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한 작품이기도 했다. 감정이 가득 담긴 페이소스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결합,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채플린은 이런 냉소에 굴하지 않았고, 다섯 살 밖에 안되는 어린 배우 재키 쿠건과 펼친 환상적인 듀엣 연기를 통해 전 세계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단숨에 스타로 거듭난 쿠건은 곧바로 차기작 올리버 트위스트 (1922)의 사랑스러운 거지 꼬마 올리버 역으로, 페이긴 역을 맡은 당시 대배우 론 채니와 함께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연달아 터진 흥행 성적 덕분에 필통, 컵받침, 도시락통, 인형 등 어디에서나 쿠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수익성 높은 굿즈 산업, 광고, 비중있는 영화 배역 덕분에 쿠건은 수 백만 달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어도 여전히 어렸기 때문에, 쿠건의 재산은 성인이 될 21세까진 부모가 관리하기로 했다. 쿠건의 부모는 매니저를 자청했는데, 굉장히 능력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성인이 되기 3년 전이던 18살, 쿠건과 부친, 외에 3명의 직원이 탑승한 차량이 샌디에고에서 교통사고를 당했고, 쿠건을 제외한 넷 모두가 사망했다. 이제 쿠건에 대한, 또 쿠건의 재산에 대한 관리 권한은 모친 릴리안, 그리고 계부 아서 번스타인에게 넘겨졌다. 세월이 흘러 21살이 된 재키 쿠건은 문득 양부와 친모의 생활을 돌이켜보다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롤스로이스와 명품, 보석으로 가득한 둘의 사치와 허세가 모두 자신의 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번스타인은 1938년 타임 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쿠건이 21세 이전에 번 돈은 모두 부모의 소유라고 분명히 정해져 있다"고 강변하며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음을 주장했다. 인터뷰를 본 쿠건은 즉각 부모를 고소했고, 이는 캘리포니아 아역 배우 보호법, 통칭 ‘쿠건 법’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모든 아역배우가 수입의 15%를 신탁기금에 적립하도록 규정된 쿠건 법은 이론적으로는 부모나 다른 대리 재정관리자가 무책임하게 자산을 낭비하지 못하도록 막아 아역배우의 권리를 보호해준다는 취지였다.


재키 쿠건과 찰리 채플린, The Kid 의 홍보용 스냅사진 / J. Willis Sayre Collection of Theatrical Photographs / 워싱턴 대학교 / Public Domain

하지만 당시 여자 판 재키 쿠건이라 불리며 라이벌리티를 형성했던, ‘베이비 페기’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배우 다이애나 세라 캐리는, 회고록이자 전기문 "Jackie Coogan : The World’s Boy King" 에서 당시 이 법안이 얼마나 쓸모없었는지를 설명했다. 부모, 매니저의 탈을 쓴 날강도 들이 법의 보호를 피해 미성년자의 신탁 기금을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쿠건의 재판이 진행 중일 때, 캐리 역시 모친과 통화를 했는데, 모친은 "이제 너도 나와 네 애비한테 똑같은 짓을 하겠구나" 라며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실제로 10대가 되기 전에 150편이 넘는 단편 코메디와 3편의 장편 영화를 찍은 캐리는, 그 수입의 거의 전부를 버는 족족 허공에 흩뿌린 것이나 다름없는 부모의 낭비로 날리게 되었다. 소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캐리가 부모와 법적 공방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이유로 캐리는 이런 과거를 널리 알리고,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고, 위대한 작가이자 영화역사학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역 배우의 권익 보호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한 캐리는 1990년 출범한 비영리 단체 ‘자그마한 배려’의 창립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자그마한 배려’는 폴 피터슨이 엔터 업계에서 활약하는 모든 미성년자를 보호하자는 취지로 설립한 비영리 단체다. 폴 피터슨 역시 아역배우로서 1950년대 ‘도나 리드 쇼’에 출연했는데, 라이벌 방송인 ‘Make Room For Daddy’의 아역 배우 러스티 해머가 자살한 것을 계기로 아역 권익 보호 활동에 눈뜨게 되었다. 이후 수 십년간 쿠건 법의 허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개정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90년 비영리 단체를 출범한 것이다. 캐리는 피터슨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물심양면으로 지지해주었고, 마침내 2000년, 엔터 업계에서 활약한 미성년자의 수입의 소유권이 온전하게 자녀 고유의 것일 뿐 부모의 것이 아니라는 판례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60여 년 간의 공백 기간동안, 재키 쿠건이 겪었을 심적 고통은 수 차례 되풀이 되곤 했었다. 대 스타 주디 갤런드의 모친은 딸이 번 돈 중 일부를 매니지 월급으로 정산 받는 방식으로 법망을 회피했다. 4년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던 만인의 연인 셜리 템플은 부친의 유산을 열어봤더니 먼지만 가득했었다. 80년대 대 스타 제나 말론과 코리 펠드먼을 비롯한 많은 아역 배우들이 부모의 형편없는 자금 관리와 막대한 빚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다행히 몇몇은 이런 합의를 원만하게 이루기도 했지만, 아동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노동법 규제를 회피하고자 한 엔터 회사들이 고의적으로 부모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판례 이후 이런 일은 줄어들었지만, 20년이나 지난 현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쿠건 법을 더욱 개정해 새로운 방식으로 착취당하는 ‘온라인 아동 인플루언서’에 까지도 법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법망을 피해 자신의 아들딸을 착취한 부모, 방기한 업계 탓에 수많은 아역 스타들이 저물어갔다. 이런 사례가 누적되다 보니 ‘할리우드 아역’이라는 고정관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아역 시절의 모든 커리어를 ‘망한 인생’ 으로 규정짓고, 성인이 된 이후를 ‘모든 풋풋함을 잃고 못알아보게 변해버린’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재키 쿠건이 이런 선입견의 첫 사례였다. 1964년 시트콤 ‘애덤스 패밀리’에서 코믹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섬뜩한 캐릭터 ‘페스터 아저씨’ 역을 맡아 스크린에 복귀하게 된 쿠건은, 자신을 사랑해 줄 관객들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하지만 그의 딸이 회상한 아빠의 복귀는, ‘예전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였지만 지금은 끔찍한 괴물로 남았다’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슬픈 모습 뿐이었다. 하지만 캐리가 전기문에 기록했듯, 쿠건은 이런 모든 사건, 선입견으로 스스로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을 굉장히 아름다운 시절이라 표현했으며, 다른 아역 스타들을 위해 ‘지치지 않는 치어리더’로서 열정적인 응원을 거듭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쿠건은 그저 이 세상이 악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몰랐던 옛날이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38년 법정 공방이 지속되는 동안 언론과 여론은 쿠건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유지했지만, 제작사와 업계에선 쿠건의 행위를 배은망덕으로 규정했다. 하물며 MGM의 사장 루이스 B. 메이어는 "어떤 파렴치한 놈도 자기 엄마를 고소하진 않는다"며 쿠건의 면전에 대고 화를 내기도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어른들 때문에 힘든 세월을 겪은 쿠건이, 세상 누구보다 믿음직한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묘사한 영화 덕분에 스타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씁쓸한 아이러니이다. 영화 ‘The Kid’ 에서 쿠건의 배역 "꼬마"는 채플린의 배역인 "양아버지 트램프" 덕분에 삶의 위안을 얻게 된다. 하물며 트램프는 꼬마를 맡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지만, 단지 꼬마가 불쌍했고, 꼬마를 위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선행을 했을 뿐이었다. 채플린은 실제로도 쿠건이 소송전에 돌입했을 때 쿠건에게 1,000 달러라는 거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 맘 때 쯤엔 채플린이 한창 새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쿠건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촬영 현장에 찾아갔다. 짧게 서로의 안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쿠건이, 사실 자기는 너무 어려서 The Kid를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자(시사회 때도 중간에 잠들었다), 채플린은 즉각 당일 촬영을 모두 중단시키고, 직접 쿠건을 상영실로 데려가 오르간을 연주해주며 영화를 모두 볼 수 있도록 해줬다.

Original Article Link

Jackie Coogan and the Fall of Hollywood’s Child Stars

Leave a comment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